합신이야기

[Vol. 34-3] 선지자의 미친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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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날짜19-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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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균 총장, 설교학

 

    발람은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을 때의 선지자입니다. 사실은 메소포타미아의 주술사였습니다. 민수기는 이 한 사람의 사건을 22-24장에 걸쳐 길게 기록합니다. 이 간단한 하나의 사건을 성경이 이렇게 길게 기록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보아합니다.

 

    모압 왕 발락이 발람에게 복채와 함께 이후의 큰 출세를 보장하면서 한 가지 요청을 보내왔습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발람은 발락의 요구가 분명히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결코 해서도 안 되는 일임을 즉각 알아챘습니다. 그런데도 복채와 보장된 출세에 대한 미련에 사로잡혀서 발락의 요청을 단호하게 물리치지 않습니다. 얼핏 신앙적이어 보이는 이런저런 명분을 내세워 시간을 끌면서 발락의 사신들을 붙잡아 두는 일을 반복합니다. 발락과 발람은 서로에게 놓치고 싶지 않은 중요한 거래처가 되고 있는 셈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을 저주하여 망하게 하겠다는 이 거래가 단순히 이 두 사람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이끄시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각각 자기의 잇속을 챙기기 위하여 하는 일인데 그것이 사실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역사를 정면으로 거스리는 것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식으로 직접 이 사건에 개입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를 막으십니다. 물론 발람이 저주하면 이스라엘이 망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이 주술사 한 사람의 저주에 따라 휘둘리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발람으로 하여금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셨다는 것이 사건의 요체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거짓 선생들에 대한 말씀을 한창 진행하다가 느닷없이 옛날 옛적의 발람을 들고 나옵니다. 교회 안의 거짓선생들의 본질이 바로 발람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사도는 거짓선생들과 발람을 이렇게 직접 연결시켜버립니다. “그들(거짓선생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벧후 2:15-16).
 

 

   사도는 선지자 발람의 행동을 한 마디로 평가해버립니다. “미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발람을 이렇게 단정하는 것은 지난 역사의 발람을 새삼스럽게 다시 비판하려는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오늘 날 교회 안에 일어나는 거짓 선생들을 책망하고 경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발람처럼 복채와 출세, 곧 불의의 삯에 마음을 빼앗겨서,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앞뒤 가리지 않고 억지를 부리며 그 불법의 길을 가려한다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선생이 주술사 발람처럼 하는 것은 사도의 표현대로 하면 미친 짓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성경은 발람의 이야기를 광야에서 그 사건이 있은 이래 시대를 초월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줄기차게 거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명기, 여호수아, 느헤미야, 미가, 베드로후서, 유다서, 그리고 계시록에서도 발람 사건은 발람의 길을 가는 그 시대의 사람들을 경고하기 위하여 등장합니다. 이것이 주는 암시는 분명합니다. 첫째는 이 문제가 그만큼 치명적인 문제라는 의미입니다. 둘째는 그러한 일은 시대와 상관없고 사람과 상관없이 언제라도 누구라도 쉽게 빠져들 만한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할 위험을 경계하라는 의도일 것입니다.
   오늘 날 한국교회의 유명 혹은 무명 지도자들이 받는 질타도,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연합단체의 지도자들에게 쏟아지는 질타도 바로 이런 문제일 것입니다. “불의의 삯”, 복채와 출세에 대한 미련 때문에 취하는 태도와 처신들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신학과 신앙의 명분을 내세워도 그것은 미친 행동일 뿐입니다. 거짓 선생은 밖으로부터 들어온 별개의 집단일 때도 있지만, 훨씬 더 흔하게는 교회 안에 있는 지도자들이 어느 순간 거짓 선생으로 변절해버려서 생기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위험한 길이 언제나 여로보암의 길이었다면, 선지자들에게는 언제나 발람의 길이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의 길로 가버린 이스라엘의 왕들을 가리켜 성경은 “악한 왕”이라는 한 마디로 단정을 지어버립니다. 발람의 길을 따라가는 교회 안의 거짓 선생들을 가리켜 사도는 한 마디로 “미친 짓을 하는 자”라고 단정합니다. 악한 자와 미친 자의 본질은 동일합니다. 자기중심 그리고 지독한 자기 욕심과 탐욕에 대한 집착입니다. 여로보암은 철두철미 자기의 정권유지에 집착합니다. 발람은 축재와 출세라는 잇속을 챙기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집착합니다. 여로보암의 길과 발람의 길은 사실 본질상 같은 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문제는 그가 왕이기 때문에 특별히 받는 유혹이거나 그가 선지자이기 때문에 특별히 빠지기 쉬운 함정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왕을 안하면 그 죄에 빠질 염려가 없고, 선지자가 안되면 그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대를 초월하고, 사람을 불문하여 모든 인간이 직면하는 문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문제는 오늘 날의 모든 신자들에게도 치명적인 유혹이요 함정입니다. 더욱이 상황이 점점 더 혹독해지고 있는 목회 현장의 목회자들과 그 길을 가려고 나선 목사후보생들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가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고,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며 깨어서 우는 사자같이 날뛰는 대적 마귀를 대적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